드롭 더 라이프 pro

게이트가 열렸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살던 세상이 시작되지 않은 게임과 같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은유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로. 일부 인간들에게는 스테이터스라는 개념이 생각났다. 레벨이라는 개념도, 랭킹이라는 개념도 생겼다. 특수한 능력을 사용하거나 그게 돌연 재능을 드러낸 경우. 세상은 그런 자들을 총칭해 아카시카-근원의 아들딸이라 불렀다. 별의 자손이며 근원의 아들딸인 아카시카에게는 별의 인력을 지닌 몬스터가 꼬인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어두컴컴한 그림자들이 아카시카들을 물어뜯고, 아카시카는 별이 내린 힘으로 몬스터를 처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굳이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으로 점지된 만큼 예상하기 쉬운 일이겠으나, 명백한 말을 굳이 한 번 더 설명하자면. 그렇다. 나는 아카시카다. 좆같은 공학수학 시험을 준비하며 내 멘탈을 대패로 얌전히 갈고 있던 어느 날 게이트가 열리고 대뜸 눈앞에 스테이터스 창이 생기면서 정작 학점에는 쓸 데도 없이 마냥 수치만 높던 아이큐가 인트 스탯으로 변했다. 어느 공순이는 그 날 돌연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땐 현실의 삼차원 벡터 공간에서 벡터 필드를 정의하고 삼차원 적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팔.

그 날 나는 공학수학 말고 내 인생을 드랍하기로 결정했다.



근미래 SF 판타지, <드롭 더 라이프>



처음엔 눈앞에 뭔 갑자기 시스템창이 뜨기에 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이게 바로 자각몽? 알면서 꾸는 꿈에선 뜻밖의 초능력 같은 걸 부릴 수 있다는데, 때마침 시스템창에 뜬 안내문도 ‘마법사 클래스로 전직하였습니다.’였던 것이다. 아니 내가 마법 따위를 배운 적이 없는데 전직은 무슨 전직이야. 일단 스킬창을 열어보고 가장 만만한 시동어부터 입 밖에 뱉어 봤다.

“매직 애로우.”

그러자 시스템창이 말했다. 매직 애로우가 발사되기 위해 적당한 추력과 비추력을 계산하여 알맞은 궤도를 모델링하고, 이에 필요한 3차원 좌표 공간에서의 선형 방정식을 해결하고, 마법이 시전 될 곳을 벡터 공간 상의 벡터 필드로 가정하여 이에 영향을 끼치는 플루이드를 지정, 해당하는 벡터를 적분하시오. (5점)

“침착하게 생각하자.”

나는 일단 창을 끄고 더듬더듬 사방을 짚다가 기껏 손에 집힌 공학수학을 열어 봤다. 꿈 주제에 공학수학의 거지같은 내용물은 몹시 멀쩡했고, 내가 아무리 꿈이라지만 공학수학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기억할 리 없으니 이건 꿈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게 뭔 개소리야. 나는 일단 휴대전화를 켰다. 생각해보니 오늘 오전에 뭔 우주의 기운으로 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다는 뉴스가 어제 떴던 것도 같은데. 이제 보니 내가 그 드물다는 마법사인 모양이다.

아니 근데 시팔 세상에 마법을 쓰려고 탄도 역학에 선형 대수에 벡터필드 지정 및 삼차원 적분을 해야 한다면 세상 누가 마법을 쓰겠느냐고. 차라리 핵탄두를 쏴 올리지! 마법사가 왜 이리 적은가 했더니 이렇게 좆 같으니 적었겠지!

“아 시팔 꿈 하고 깨어날 수는 없는 건가.”

그리고 물론 깨어날 수 없었다.

역시 인생을 드랍하면 될 각입니다 하늘에 계신 신교수님.

낯선 반향 001

우아한 부채 뒤에 음모를 숨기고 화려한 미소 뒤로 혀끝에 독을 삼킨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잔상, 허구 뒤에 그림자처럼 늘어진 실체를 밟고야 인류는 비로소 이 시대에 섰다.

전진도 후퇴도 없는 순간에, 문명만이 삶을 제쳐둔 채 진화의 바다로 뛰쳐나가 버렸다.



낯선 반향



한 눈 팔 새도 없이 날카로운 궤적이 목덜미를 스쳤다. 피부 가죽을 얇게 잘라낸 강철 손톱이 이번엔 허리를 양단하려 들었다. 득달같이 몸을 뒤로 젖히며 등 너머로 바닥을 짚은 아델하이드가 몸을 풍차처럼 돌리며 빠르게 상대의 얼굴을 돌려 찼다. 캉- 번갯불 같은 붉은 머리칼이 몇 올 잘려나가서 공중에 붕 떠올랐다가, 강철 손톱과 부츠 뒷면의 칼날 사이에서 찢겨 나갔다.

뒤에서 달려드는 또 다른 적이 탐지기에 잡히는 순간 아델하이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쩡, 그녀는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교차해 붙들었다. 아직 바닥에 내려앉기도 전에 그녀는 허리를 비틀듯 상체를 돌렸다. 눈동자에서 녹색 스파크를 튀기던 아델하이드의 검에서 푸른 섬광이 치밀어 올랐다. 츠츠츠, 벌레 우는 소리와 함께 푸른 은색 번개가 일순간 양손에 치밀하게 차올랐다가, 콰르르- 마치 폭풍우 같은 비명을 터트리며 눈앞의 상대를 양단했다. 그리고 곧장 섬광처럼 회전하며 뒤에서 달려들던 자의 한 팔을 잘라냈다. 푸른 육각형의 디지털 로그가 쓰러진 살덩어리 위에 두어 겹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순간 아델하이드의 가터 부츠가 바닥에 닿았고, 꽝- 순식간에 세상이 뒤집혔다.

후우- 후욱- 어디선가 거슬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싶었을 때 아델하이드는 이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에이다! 무슨 일이야!— 귀에 꽂은 통신기가 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뱉었다. 아델하이드는 가까스로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목구멍까지 들어찬 핏물을 반항적으로 뱉어냈다. 그제야 탐지기가 적의 접근을 알렸다. 이런 좆 같은! 아델하이드는 가까스로 쌍검을 교차해 가슴팍 바로 앞에서 충격을 완화하며 탐지기 성능 개선 요구에 모르쇠로 답하던 박사 안필로트에 대한 욕을 질겅질겅 씹어삼켰다.

“시팔, 별 거 아냐.”
—3구역인가? 내가 3구역에 간다! 너희는 이곳을 지키고……. —
“쟁알쟁알. 시끄러워 뒈지겠네. 닥쳐, 킬리언.”

검은 갑주를 입은 인물이 비정상적으로 긴 팔을 늘어트린 채 붉은 안광을 빛냈다. 방독면 같은 것이 개의 주둥이처럼 검게 튀어나와서 쉭 쉭 환자 같은 숨소리를 냈다. 아델하이드가 녹색 눈동자를 서늘하게 가라앉히며 일단 몸을 물렸다. 분명 ‘중독자’다.

그녀는 방금 전 가슴팍을 걷어차던 인간 같지 않은 힘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쌍검은 방어를 등한시할 때가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 전투방식이었고, 그녀는 중독자를 상대할 때 방어를 무시하면 어떤 꼴이 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베테랑이었다. 귓가에서 킬리언이 진중하게 걱정을 전했지만 아델하이드는 다시 한 번 핏물을 뱉어내며 전신에 번개를 둘렀다. 치지직, 통신기의 전파장이 방해를 받으며 잡소리가 사라졌다.

“침입자는 지금 막.” 일단 지껄이며, 무릎까지 감아올리는 검은 부츠가 푸른 육각형의 로그를 짓밟고 땅을 박찼다. 쩡- 압력이 높아진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한참 나중에야 귓전을 두드렸고,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너머로 중독자의 비정상적인 팔이 그 자체의 무기처럼 꽝- 공기를 터트렸다. “강제 종료 시켰으니까!” 아델하이드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과거형으로 지껄이고 나서야 푸른 번개가 중독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쩌저정, 고온에 급속도로 팽창한 공기들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뒤늦게 귓전을 때렸다. 아델하이드가 심드렁한 태도로 귓가를 툭툭 두드렸다. 전신에 둘렀던 번개가 가라앉으며 그제야 통신기가 다시 노이즈를 뱉기 시작했다.

쿠르나타 퀼=아델하이드 맥틸런, 아르체나 제국 황제가 직접 퀼의 칭호를 내린 쿠르나타 기사단의 젊은 여단장은 특유의 무덤덤한 목소리로 짧은 말을 덧붙였다.

“킬리언.”
—문제라도 생겼어?—
“잊고 있었는데 돈 갚아. 천만 에텔.”
—흐으윽, 맥틸런 중령이 방금 3구역의 습격으로 인해 불운하게 사망했다. 내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러 갈 테니...—
“진짜 뒈지고 싶냐?”

신경질적으로 지껄이며 그녀가 남은 검 한 자루도 마저 납검했다. 육각형의 디지털 로그가 파괴된 건물 곳곳에 생겨났다. 시스템이 재구성되는 걸 바라보던 아델하이드가 녹색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이곳은 가상의 세계였다. 그리고 바로 그 가상의 세계가 쿠르나타 기사단의 무대였다.

제 2의 현실, 세피로트에서 제국의 존망을 건 전쟁이 일어나기 약 반 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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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펑크, 디젤펑크, 사이버펑크를 차례대로 거친 바로크-로코코 풍의 왕정 사회 여주물(ㅋ ㅋ ㅋ ㅋ ㅋ ㅋ)

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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