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쟈니엘 법무청 막내입니다만, 그래서 그거 사건접수입니까? Case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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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12. 14. 22:55
검고 아름다운 머리칼이 한 쪽으로 가지런히 모여 공단 리본으로 질끈 동여매져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공단은 예사 평민이 가질만한 것은 아니었다. 요컨대 이 리본으로 머리를 한 쪽에 넘겨 모은 이 밋밋한 아가씨가 예사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종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론 그게 정말 이 아가씨 본인의 타고난 집안 덕인지, 누군가 주변인의 협조인지, 아니면 그 본인의 실력인지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중요한 건 이 아가씨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좋은 일 없으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햇볕 좋은 오후에, 자니엘 법무청 가장 아래층 접수 데스크에서 그 아가씨에게 겁도 없이 상체를 기울여 꾸준히 집적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결혼하자.”
물론 그는 그런 표식 따위 씹어 먹어도 될 만큼 세력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 아가씨에게 집적대서 좋은 꼴 못 볼 것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심각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거 추행입니까?”
요컨대,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남자는 지치지 않고 속삭였다.
“싫으면 약혼은 어때.”
“의도적인 공무집행 방해로 봐도 좋은 겁니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 주지.”
“손에 물 묻히고 사는 귀족 여인이 있다고는 들어도 보지 못했군요.”
“신혼집은 어디가 좋아?”
“고견 잘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변호사와 검사님 앞에서 하시지요, 각하.”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냐. 나 진짜 이러다가 얼굴도 못 본 공주랑 결혼하게 생겼다고.”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얇게 저민 레몬향이 파르르 풍길 것처럼 올이 가늘고 색이 밝고 따스한 금빛 머리칼이 가느다란 햇살처럼 책상 위로 늘어졌다.
“아아, 라니에. 라니에. 무정한 사람.”
“이름 부르지 마십시오, 닳습니다.”
“라니에, 너랑 내가 무슨 사이인데 이제 와 날 버리는 거니?” 남자가 섬세하고 감성적인 조각 같은 얼굴을 들어올리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딱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혀를 찬 라니에 벨하르트가 그의 두 손을 부여잡고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러게요.”
“궁금하군요. 이참에 들어봅시다. 대체 각하와 제가 무슨 사이입니까?”
"함께 목욕을 하고 지친 나신으로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그리고 이제 제가 각하를 법정에 세우면 될 것 같군요. 안녕히."
“아, 잠시만.”
“4주 뒤에 뵙겠습니다.”
“아, 잠시만!”
리하르트 폰 에델가르샤 공작이 성추행으로 고소된 것은 3일 후의 일이었다.
쟈니엘 법무청 막내입니다만,
그래서 그거 사건접수입니까?
Case 01.
쟈니엘 법무청 막내입니다만, 그래서 재상 각하는 이제 유부남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라니에가 나한테 너무한 것이 틀림없다.”
에델가르샤 공작이 진지하게 턱을 괴고 뇌까렸다. 그의 집무실을 정돈하던 유모 소피가 그를 몹시 유감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책상 옆으로 지나쳤다.
“우리는 남매 같은 사이인데.”
“남매 같은 사이에 청혼을 하시니 그렇지요, 도련님.”
“그렇지만 난 어릴 때부터 당연히 내 상대는 라니에밖에 없을 줄로만 알고 자랐다고? 이제 와서 생판 얼굴도 모르는 알베타 2공주랑 혼인이라니 말도 안 돼. 나한텐 라니에랑 결혼해서 아들 둘 딸 하나 낳고 알콩달콩 사는 미래계획 외에는 그다지 가정계획이 없었단 말이야.”
“차라리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세상 무슨 평범한 여자가 싫은 사람이랑 결혼하느니 너랑 하겠다는 말에 좋아하겠어요?”
“그럼 당장 가서 사랑한다 말하고 무릎을 꿇은 후 장미를 바칠까? 역시 그게 좋겠지? 그래, 내가 너무 낭만이 없었어.”
“아뇨, 그러셨다간 당장 법정에 끌려가실 것 같은데요.”
아아악……. 에델가르샤 공작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소피가 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창틀을 걸레로 북북 문질러 닦았다. 그녀는 에델가르샤 공작의 유모이며, 동시에 라니에 벨하르트와 에델가르샤 공작의 젖어미이기도 했다. 또한 라니에 벨하르트의 대모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라니에와 리하르트를 두 팔에 안고 함께 키운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좀 한심하기까지 했다. 그런 소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에델가르샤 공작은 저 홀로 슬퍼 괴로워하고 있었다.
“알베타 2공주라는 여자는 내가 알베타에 외교 문제로 갈 때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치시사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고. 그리고 젠장, 알다시피 나는 그쪽 외에는 얘기할만한 게 어린 시절밖에 없는 인간이란 말이지. 기껏해야 검술인데 그럼 그 여자와 식사 자리에서 무슨 얘기를 할 것이며 일평생 무슨 대화가 오가겠어? 그런데 라니에는 생각해 봐, 지나칠 정도로 할 말이 많을 거야. 음. 지나칠 정도로……. 아니, 그 이전에.”
잠시 에델가르샤 공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껏 믿어 왔던 미래 계획에 문제가 생겼어. 라니에가 순순히 나랑 결혼해 줄 리도 없고 날 사랑할 리는 더더욱 없어!”
“아니, 그걸 이제 아셨어요? 정치랑 검술 외에 하실 줄 아는 게 대체 뭐 있으세요?”
“조용히 해, 소피. 그거 비밀이란 말이야. 다들 내가 전천후로 능력 있는 줄 안다고.”
“도련님의 착각이에요…….”
“애초에 3년만 지나면 라니에도 사춘기가 되겠지, 5년만 지나면 성인이 되겠지 하다 보니 이 꼴이 난 거야! 그런데 어느 새 라니에가 노처녀 소리를 듣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고! 사실 라니에가 살아 있는 영장류랑 연애를 할 일이 없을 것 같으니 기다리면 되는 일이긴 한데, 아니 그런데…….”
“그리고 폐하께서 도련님께 은근히 결혼 압박을 넣으셨고 말이죠? 그 이전에 라니에에 대한 평가가 너무하시네요.”
“아악.”
에델가르샤 공작이 몹시 괴로워했다. 그때 두어 번 노크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피가 잠시 문을 바라봤다가 공작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공작이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놀랍게도 그는 꽤 권위 있게 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고, 표정을 바꾸고 머리칼을 다듬자 그럭저럭 괜찮은 귀족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들어와.”
그의 허가가 떨어지자 들어온 것은 외당을 맡고 있는 집사 케일리였다. 케일리는 예를 갖춰 인사한 후 막 방을 나서려던 소피를 만류했다. 그녀가 들어도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표시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에델가르샤 공작은 지금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힘들 것 같다고 전해.”
“라니에 양입니다만.”
“농담인 걸까?”
“저는 농담이라는 것을 할 줄 모릅니다. 이곳으로 모셔올까요?”
“내가 가지.”
에델가르샤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련님, 쉬운 남자는 매력 없어요.” “조용히 해, 소피. 비싸게 굴다간 정말 골로 가는 수가 있다고.” “그건 그렇네요.” 그들은 속닥속닥 떠들며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에 내려갔다. 진지하게 굳어서는 긴장한 얼굴을 한 채 라니에가 자신에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으며 이건 신이 내린 기회가 아닐까 어떻게 다시 청혼하면 좋지 뇌까리는 이 영민한 멍청이 주인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케일리가 연애 조언을 몇 개 지나가듯 던졌다.
응접실 앞에 도착한 에델가르샤 공작은 지금까지의 공작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띠기까지 한 아름답고 우미한 낯으로 문을 직접 열어 젖혔다. 문을 열어드리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수근거렸다. 공작님도 어쩜 사람이 안 변하실까.
“라니에!”
“좋은 오후입니다, 각하. 고소 취하 사실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큽, 케일리는 조용히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삼켰지만 정작 에델가르샤 공작은 크게 타격 받지 않은 얼굴로 반갑게 라니에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차피 라니에가 고소를 넣고 정에 못 이겨 취하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충은 짐작하던 부분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말로 원한을 만들어 고소를 할 정도의 사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말이다.
와중에 리하르트 에델가르샤가 햇살이 피어날 것 같은 다정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홍차를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려 준 그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이 하얀 뺨 위로 미소처럼 흐드러졌다. 라니에가 무심한 얼굴로 홍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날 보러?”
“각하를 뵙고 고소 취하 사실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나랑 저녁 먹으러?”
“각하를 뵙고 고소 취하 사실을 알려드린 후 돌아가서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기 위해 이 좋은 오후를 노려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너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니?”
“고소 취하를 취하할까요?”
“아아, 라니에. 라니에.”
에델가르샤 공작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 찍어내는 시늉을 했다. 라니에는 심드렁히 그를 바라보다가 홍차를 마저 목으로 넘겼다.
“매정한 사람 레퍼토리는 식상하니 다른 걸 해주시겠습니까?”
“사랑스러운.”
“알려드렸으니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악. 저녁 먹고 가.”
“집에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들이 있어서 곤란합니다.”
“현실적으로 있겠냐? 알겠어, 오늘은 더 이상 그 얘기 안 할 테니 저녁 먹고 가.”
에델가르샤 공작이 간절하게 라니에의 두 손을 붙들고 속삭였다. 그의 아름다운 카키색 눈동자가 애처롭게 빛나자 라니에의 건조한 얼굴에 이내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요컨대 거절의 선행 작업이었다. 그걸 빛보다 빠르게 눈치 챈 리하르트 에델가르샤가 먼저 웃는 낯으로 선수를 쳤다.
“소피와도 오랜만이잖아.”
당연스레 거절의 말을 꺼내려던 라니에가 잠시 갈등하는 눈으로 소피와 에델가르샤 공작을 번갈아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린 에델가르샤 공작이 선명한 회색처럼 보이기도 하는 진한 카키색 눈동자를 굴려 소피에게 눈짓을 했다. 소피는 치마 끝을 살짝 들어 올려 보인 후 먼저 라니에에게 다가갔다. 라니에는 드물게 미소를 머금고는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케일리는 주변의 하녀들을 데리고 주방에 식사 준비에 대해 지침을 내리기 위해 물러갔고, 리하르트는 다리를 꼬며 소파에 푹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비스듬히 턱을 괸 후 소피와 라니에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걸었다.
요컨대 그가 상상하고 바라는 미래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저택에는 라니에가 있고, 소피가 있고, 케일리가 있고, 다른 수많은 고용인들이 있다. 에델가르샤 공작은 라니에와 소피가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에 평화를 찾는다. 말했듯, 그의 인생에서 특기할 만큼 화젯거리 삼을 만한 것은 유년밖에 없었고…….
“아, 각하.”
돌연 라니에가 그를 불렀다. 일반적으로 라니에의 인생에서 리하르트는 최하위의 우선순위를 자랑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리하르트는 조금 막막해졌다.) 이런 일은 흔치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리하르트가 얼 빠진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으응?”
“사실 이번 취하는 제가 손을 쓰기도 전에 먼저 칙령이 은밀하게 전달되었는데요.”
“……으응……?”
에델가르샤 공작은 불길해졌다. 라니에가 담담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에델가르샤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재상 각하는 이제 유부남입니까?”
“…….”
“미리 결혼 축하드립니다. 다행히 알베타 2공주님은 미인이라고 하시더군요. 이제 그런 질 나쁜 장난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줄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니에…….”
“예?”
“아냐, 너의 그런 점을 좋아해…….”
에델가르샤 공작은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다정하고도 미려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생각했다.
내 꿈, 내 미래계획……. 정말 꿈같은 미래…….
어쩌면 정말 그냥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를지도…….
“하하, 내가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조금 눈물이 나네.”
“먼지가 많습니까?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 최근 검술 수련이라도 게을리 하셨나 봅니다. 몸이 쇠해지신 게 아닙니까?”
소피마저 눈물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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