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팔로워 이벤트/라스타반, 알타이르의 죽음] For.유가님
[라스타반, 알타이르의 죽음]
5학년이 끝난 방학에는 스티미스트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다. 결국 중간에 심장병이 도져 안드라스와 둘만 남겨져 반절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지만, 라스타반 기안사르의 인생에 있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단지 6학년을 마치고 방학이 되어 저택에 돌아왔을 때, 그는 낯선 아이와 마주해야 했다. 허리에도 오지 않는 작고 따뜻한 것. 돌이켜 보자면 마지막으로 저택에 있던 이 년 전의 여름, 기안사르 부인의 배가 조금 불룩했었던 것도 같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건조하게 생각했다. 그런가. 그들은 결국 예정했던 두 아이와, 바라지 않았던 죄의 씨를 뿌리고도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한 모양이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애교 있게 휘어지는 잿빛 자안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가 웃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린 막내 알타이르는 셋째 형을 유독 좋아했다. 하기야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두 형들보다야 다정스레 웃고 안아주는 형이 어린 아이에겐 더 매력적이었겠지.
굳이 어린 아이에게서만이 아니더라도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사랑 받을 자신이 있었다. 누구에게든지, 바라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는 사랑을 원했던 자들에게서 사랑 받아본 적이 없어, 바라지 않던 자에게서라도 사랑 받는 것이 기뻤다. 알타이르 기안사르의 사랑을 제외하고.
알타이르 기안사르는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아이였다. 라스타반 기안사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마음이 아프기는 했던 모양이다. 라스타반 기안사르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쏟아냈던 저주의 말들을 들으며.
당신들은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고통이 과연 얼마나 컸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고통보다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에게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되어버렸으니.
그래서, 그저, 그렇구나. 하고.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생각했다.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지켜보듯 턱을 괴고 그 따스한 가정을 바라보았다. 얼굴만 마주쳐도 집안의 우환이라 인상을 찌푸리는 큰 형님도, 입만 열면 사납고 날카로운 비수를 쏟아내는 둘째 형님도 그 작은 꼬마 앞에서는 쩔쩔매며 표정이 풀렸다. 무뚝뚝한 얼굴로 애써 웃었다. 그 꼴이 우습기도 했고, 새롭기도 했고.
조금 끔찍하기도 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인간의 감정을 치밀하게 이해했다.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과정은 언제나 그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었다. 알지 못했던 것을 그의 지성으로 찾아낸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존재를 긍정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사랑도, 희생도, 기쁨도, 감사함도, 연민도, 슬픔도 알았다. 단지 그가 아는 감정의 대상이 기안사르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아아, 그래. 끔찍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그의 심장에서 출발해 전신을 돌고 있을 핏물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피가 흐를 저 여자, 저 사람, 저 청년들. 저 꼬마마저도. 전부 끔찍했다. 무엇이 얼마나 끔찍한지. 논리적이지 못한 감정은 그들을 볼 때마다 혈액처럼 역류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있도록, 크게 흥분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단련시켜 왔다. 그래서 그다지 격정에 사로잡힐 일은 없었으나.
견딜 수 없이 괴로워 질 때가 있다.
자신이 얼마나 환영받지 못할 존재인지, 어째서 죽었어야 했는지 알게 된 후로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집안의 사람들과 얽히지 않고 살아왔다. 고작 십오 년이나마 그는 언제나 완벽한 삶을 살았다. 흠집 잡힐 일도, 누군가와 얼굴 붉힐 일도 없을 인생이었다.
알타이르 기안사르를 중심으로 네 명의 기안사르가 모여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관중처럼 그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틀었다. 그는 애초에 그 자리에 끼지도 않았고, 부름 받은 적도 없다. 거슬리는 것은 그들이 있는 정원의 티테이블이 라스타반 기안사르가 종종 사용하는 자리라는 것뿐이었다.
문득 어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똑같은 색깔을 지닌 두 눈동자가 새삼스레 마주쳤다. 알타이르는 자신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는 것을 방학이 시작된 지 한 달이 훌쩍 지난 최근에야 조금 인식했다. 아이는 활짝 웃었다. 높은 체온처럼 따뜻한 감촉으로.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새삼스럽게도 그것이 태양 같다 생각했다.
그는 눈 꼬리를 조금 휘고, 입술 끝을 길게 늘어트렸다. 언제나 아이들은 라스타반 기안사르의 다정스럽고 우아한 얼굴을 좋아했다. 알타이르도 예외는 아니었고. 형아, 짧은 발음으로 튀어나온 말에 그 주변을 둘러싼 가족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의 얼굴이 사납게 굳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웃었다. 조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섰다. 알타이르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름대로 즐거운 관람이었다.
그는 가정이나 가족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단지, 단지.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을 나도 소중히 여겨서,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라, 안. 친애하는 나의 형제. 그것이 내 유일하고도 간절한 꿈인 것 같아.
아마 언제까지고 이루어지지 않을. 일 년 전 결국 둘만 남은 병원에서 새삼스레 나누었던 말이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1층의 서재를 향하던 발걸음이 순간 무언가에 붙들렸다.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작은 손 뒤로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꼬마가 배시시 웃었다. 형아. 어물어물 부르는 목소리가 문득 입안에 사탕을 굴리듯 이쪽 귀에서 저쪽 귀로 굴러다녔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조금 미진하게 웃었다.
“저런, 알타이르.”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조심스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조금 묵직하지만 그래도 들어올릴 만 했다.
“부모님께 가야지.”
작은 머리통 너머로 창백하게 질린 여자를 바라보며,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다시 웃어 보여야 했다. 그는 웃는 것이 가장 자신 있으니까.
“걱정하시잖니.”
왜애? 입모양으로 나온 질문을 똑똑히 듣고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그 뺨에 다정스레 입 맞추며 대꾸했다. 너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연약하고, 착한 아이니까 그런 거란다. 사랑스러운 내 파란 제비꽃. 그러자 알타이르는 까르르 함성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라스타반은 그 자리에 아이를 다시 내려놓고 여자가 다가오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래서 그는 그 순간 기뻤던가? 알타이르 기안사르가, 열 살 된 그 꼬마가, 결국 기안사르의 건드려선 안 될 마법에 손을 댔다가 엉엉 울며 그를 찾아왔던 그 날.
“알, 나의 사랑스러운 파란 소년 알타이르.”
냉정하고 침착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다리에 매달려 형, 형, 이름을 부르던 뺨을 쓸어 눈물을 닦아 주며 그 이마에 입 맞추던 그 날.
“너무 걱정하지 마렴.”
어린 아이의 손이 어깨를 파이도록 붙들어 결국 시퍼런 상처가 남았다. 그렇지만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알타이르 기안사르를 품에 안고, 그저 다정스레 속삭였던 것이다.
“이젠 아프지도, 두렵지도 않을 거야.”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알타이르 기안사르를 치료해 주지 않았다. 방법이야 몰랐지만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본인의 심장마저 어느 정도 제어 하에 두고 있던 당대 최고의 젊은 치료사는 그저 외면한 것이다. 아니, 아니, 어쩌면 정말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르지. 한 눈에 관찰했을 때 알아내지 못했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본인이 아는 것을 외면했다고 봤다.
그가 죽기를 바랐었나? 피를 토하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서 홀로 늘어져 있던 형을 찾아왔던 다섯 살 꼬마를? 그저 춥고 오한이 들어 무서웠다며 주섬주섬 내뱉던 목소리를? 결국 창백해진 얼굴로 조심스레 다가와 형이라 불러주던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무섭냐고 묻고는 상냥하게 웃으며 품에 안겨 달래주던 그 작은 두 손을?
갈기갈기 살해하고 싶었나?
그런 것은 아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그 아이를 많이 아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엾은 알타이르. 그래서 나는 기뻤단다. 네가 더 이상 수많은 진실을 마주하고 알아낼 필요가 없어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너를 죽이게 되어서.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그 작은 몸을 품에 안아 들고 문을 나섰다. 맞아. 눈물이 났다. 죽은 자의 몸 치고는 아직 따뜻해서.
때때로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품에 가득 들어차던 작은 손이 생각났다.
맞아.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알타이르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시샘하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작은 몸이 점점 차가워져서.
추운 날을 두려워하지 않을래요, 형.
“나가.”
아이의 죽음을 전해 듣자마자 라스타반 기안사르의 멱살부터 잡아 올렸던 큰 형님의 얼굴은 이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마치 보고 싶지 않았던 망령이라도 나타난 것 같은 표정으로 라스타반 기안사르의 젖은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꼴로도 웃고 있을 거라면, 차라리 알타이르의 앞에서 꺼져 버려.”
뺨을 쓸면 눈물이 났다. 그래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해, 알타이르. 너는 이제 추운 날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잖니. 그는 병실 바깥의 작은 의자에 주저앉아 생각했다. 리겔은 그에게 웃고 있을 생각이라면 사라지라 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있으면 좋지. 알타이르는 죽었다. 라스타반 기안사르가 죽였다. 바라던 일들이 바라던 대로 되었고, 그는 이 상황에 기쁨과 환희마저 느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소 짓는 것이 가장 쉬웠다. 우는 것보다. 화내는 것보다. 맞아. 그저 웃는 것은.
추운 날이면 내가 형을 찾아올 테고, 그럴 때면 나는 형을 이렇게 안아줄 테니까.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에 쟁쟁 울리는 목소리가 어물어물 서툰 발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라스타반 기안사르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러니까 이젠 아프지 않을 거야. 형아도.
하여 라스타반 기안사르는 영원히 두려워할 것이다. 추운 밤을. 차가운 손을. 죽은 자가 돌아오는 날을. 물안개 낀 저녁을. 작은 손을. 태양 같은 순간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내가 이렇게 꼭 안아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