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2차창작/그라앗

님들 제가 미쳐서 크오를 씁니다만 뭐가 문제죠 01.

안나Y 2015. 12. 25. 17:36

 푸른 파도가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백사장에 부딪쳤다. 몸을 감아 들어왔다가, 다시 감고 빠져나간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그의 젖은 머리칼을 뒤흔들었다. 데일 듯한 햇살이 눈꺼풀 사이를 억지고 벌리고 들어왔다. 프리드는 신음 같은 소리를 삼키다가 파르르 손끝을 떨었다. 손끝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눈을 뜨는 일조차 고역이었다. 그러나 몸이 제대로 말을 안 듣고 어찔어찔한 이 순간에조차, 프리드의 이성은 뜻밖에 냉철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과거 그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잃었다. 처음엔 왁자지껄했던 영웅의 무리는 어느 순간 단 한 명의 사람만을 남겨두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느 머나먼 미래에 그들을 남겨둔 채, 프리드만이 과거에 남았다. 처음에는 절망이었고, 둘째로는 슬픔이었고. 그 후에는 아득한 괴로움과 미련에 시달렸지만.


 그는 기어코 미래로 먼저 떠나버린 친구들을 위해, 어떻게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꼴이었다.


 “으…….” 신음을 뱉는 순간 격한 통증이 그의 목을 찢어발기는 듯 했다. 프리드는 조금 더 인상을 찌푸리며 가까스로 손끝을 꿈틀거리고, 이윽고 조심스레 눈꺼풀을 열었다. 눈을 태울 것만 같은 강렬한 태양이 시야에 들어오려는 찰나, 무언가가 그의 눈 위를 덮었다. 한순간에 프리드는 어둠 속에 있었다. 그러나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드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힘겹게 모래사장을 손끝으로 긁어모으고 일어나려 했지만, 뜻하지 않게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버린 그의 몸은 끔찍하리만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프리드의 눈을 가린 무언가는 더 이상 뭔가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아마 사람의 손일 것 같은 온기가 미진하게 프리드의 뺨으로 번지고, 그가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렸다. 전혀 모르는 언어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어둠 속에서 프리드는 천천히 희미한 빛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푸른 바다 내음, 파도가 밀려들었다 빠져나가는 아득한 촉감, 물에 젖은 몸. 바닷새들의 날갯짓. 프리드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는 이전보다 더더욱 침착해진 채 숨을 뱉고, 이제 좀 감각이 돌아온 손끝으로 제 눈을 덮은 것을 힘겹게 붙들었다. 과연 사람의 손이었다.


 “여긴……. 어디지? 당신은 누굽……. 니까?”


 목이 갈기갈기 조각나는 것 같은 통증에도 프리드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남자가 웃었다.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다가 음, 소리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싸한 감촉이 프리드의 몸을 뒤덮었다. 그는 이 비슷한 감각을 알고 있었다. 마법이었다. 치료사가 온 모양이다. 프리드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좀 편해진 몸으로 남자의 손을 치웠다. 이번엔 그는 순순히 손을 치워주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밝은 빛에 눈이 좀 따끔거렸지만 그럭저럭 주변을 살필 정도는 됐다. 프리드는 남자가 일부러 프리드의 시력을 위해 눈을 가려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감사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시야를 좁힌 프리드가 천천히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화려하고 우아한 백금발이 새하얀 얼굴을 굽이쳐 장식하고, 마치 청명한 얼음, 차갑고도 서늘한 수정 결정과도 같은 눈동자가 미려하게 휘었다.


 “이젠 말이 통할 겁니다. 하지만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당신이 어쩌다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프리드는 잠시 한 번 더 바다 내음 섞인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해안들을 떠올렸다. 프리드가 말이 통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는 바닷가 몇 개를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단지 어느 바다든 황야에 있던 프리드가 갑자기 내던져질 곳은 아니었다. 그나마 비슷한 곳이라면……. 무릉도원 쪽의 어느 알려지지 않은 도시인가?


 프리드는 이제 확신했다. 미래의 후계자에게 힘을 전달하려던 마법을 쓰던 과정에서, 그는 시공의 축을 잘못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힘은 제대로 옮겨갔는지 모르겠지만 몸 상태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쳐도 그의 마력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당장은 무언가 확인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목은 아직도 끔찍하게 아파왔다. 프리드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큼큼거리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몸을 제대로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짧은 머리칼의 여자가 친절하게도 프리드의 등을 받쳐주었다. 프리드는 여자에게 상냥하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 아까부터 배려 감사합니다. 여긴 어딘지 말씀 좀 물을 수 있을까요?”

 “모르고 오셨습니까?”


 남자가 서늘한 눈을 고스란히 가늘게 뜨며 조용히 웃었다. 프리드는 그가 어쩐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눈치를 받았지만, 그렇다기엔 남자의 태도는 워낙에 친절했다.


 “이곳은 브리스티아의 키엘체입니다. 제가 잠시 살피기엔 오르페시아 대륙 분이신 것 같은데, 키엘체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제 관할의 영토이기도 하죠.”


 키엘체——? 브리스티아, 오르페시아 대륙……? 프리드가 머릿속에서 그 지명을 찾아볼 때, 남자가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당신은 굉장한 마력의 폭풍을 일으키며 이곳에 침범한 밀입국자이기도 하죠.”

 “그, 예?”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 설명을 요구할 시기는 아닌 것 같군요. 방금 해드린 것은 일시적인 치유마법입니다. 제대로 된 치료는 아무래도 아르모니아 쪽에 성직자 파견이라도 요청해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귀하가 어느 곳에서 오신 고명하신 마법사이신진 모르겠으나, 최대한 부족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회복하시면 그때 다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프리드는 잠시 대꾸 없이 머릿속에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작금의 메이플 월드에서 가장 현명하고, 또 가장 많은 진리에 닿은 사람이었다. 시간의 여신에게서 권능을 위임받았고, 메이플 월드 깊숙한 곳에 뿌리 내린 어둠을 뽑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이윽고 악을 봉인하고 홀로 남은 그 때에.


 그는 키엘체라는 곳에 대해 들어 본 적도, 브리스티아는 물론, 오르페시아 대륙이라는 것에 대해서조차 처음 들었다. 그는 잠시 손을 쥐었다 펴다가, 자신과 그들 사이의 언어 소통을 이루어 낸 마법에 대해 생각했다. 마력의 운용 방식은 비슷했지만……. 그는 기운이 몸을 돌고 나가는 방향이 일반적인 치료 마법과 반대 방향이었던 것을 이제야 개달았다. 이내 프리드는 허탈하고도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싶었지만, 그의 명민한 머리는 이미 결론을 내린 후였다.


 프리드가 이제 홀로 남은 세계에 영웅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그들 세계에 더 나으니 언젠가 이루려던 잠적을 이렇게 했다 치면 좋을지, 아니면 아직은 프리드가 좀 더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해 안타까워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남자가 다시 고명한 작가의 선이 고운 초상화처럼 웃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굉장히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었고, 말투 또한 나긋나긋했다.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프리드에게 조언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얌전히 계셔주셔야 서로 편할 것 같군요.”


 프리드는 그를 바라보며 벌써부터 훗날 누군가를 설득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절망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미래의 후계자에게 힘을 전하려다가 시간과 공간의 축을 건드리는 바람에 차원을 건너뛰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범인이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해 불가능의 영역을 납득해 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 여긴 메이플 월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에게 남은 것이 없는 세계였고, 가엾은 자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다 했으니 프리드의 의의는 이미 그곳에서 사라졌다고 봐야 좋았지만. 프리드는 허탈하게 웃고 싶기도 했고, 또 혹은.


 먼 미래에서 자신을 기다릴 어느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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